2016/06/01 07:37

정병러 팀블로그 투고글 1 Piece of Thoughts

정병러 팀 블로그에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나서 내 우울증에 대한 고찰을 시도해봤는데 결국 익숙한 자기 비난으로 끝나버리기 일쑤여서 영감을 얻고자 지난 일기들을 찾아봤다. 마지막에 쓴 일기는 올해 1월이었고, 그 바로 전 일기는 놀랍지 않게도 작년 1월이었다. 지금은 2016년 5월의 마지막 날이고, 나는 지난달, 그리고 그 전 달, 그 전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2015년은 다른 해와 다름없이 365일 정도의 날이 있었을 것이고, 그 하루하루는 변함없이 24시간이었을 텐데, 12월이 11월 같았던 것 같고, 또 그해의 시작과 끝이 비슷한 것 같고... 애써 기억해 보자면 8월 말부터 12월까지는 마지막 학기였고, 졸작을 했었던 것 같고.. 마치 눈가리개를 하고 모래밭을 더듬어 조개껍데기를 찾는 것처럼 서툴게 되짚어야 겨우 희미하게 생각이 나고 그 모든 기억이 뭉뚱그려져 멍하게 느껴져서 작년 일이 마치 3년 전쯤 일인 것 같다.

나는 중증 우울증과 ADHD진단을 받은 정신병 환자다. 성적(sexual) 트라우마도 있고, 지금은 섭식장애랑 종종 가벼운 불면증도 있다.

이렇게 나의 병에 대한 진단명을 나열해도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들이어서 아무런 느낌이 없다. 이건 내가 지난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나와 함께였던 병을 구체화해 인정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니 좋은 일일 수도, 아니면 저런 심각한 병명들이 내 이름과 같이 느껴질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앓아왔다는 뜻이니 나쁜 소식일 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나는 오랜 시간에 걸쳐 내 정신병을 이제 드디어 죄책감이나 자책감 없이 내 것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주변에 "정병러 커밍아웃"을 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나의 치부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인데도 아무 느낌이 없다는 건 아마 내가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일 것이다. 실은, 내가 이렇게 죽지 않으려고 열심히 치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칭찬이라도 받지 않으면 내가 붙잡고 있는 실낱같은 삶에 대한 희망을 쉽게 놓아버릴 것 같아서일지도 모르겠다.

내 낮아진 자존감은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스페이스 바를 한번 누를 때마다 멈춰 서서 자기검열을 한다. 우울증을 오래 앓으면 뇌세포가 죽는다고 들었는데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다음 날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내 글도 나를 닮아 다음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가 보다. 정사각형님께 팀 블로그에 참여하고 싶다고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놓고 나서도 나는 자기 비난을 멈출 수가 없었다. '글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문장을 쓴 것도 오래전 일인데.' '여러 사람이 보는 곳에 글을 게재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한글로 된 글을 조리 있게 잘 쓰지 못하는데.' 부터 시작해서 익숙하고 오래된 '나는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해야 할) 상황에 있는데 괜히 힘들다고 투정부리는 거 아닐까?' 하는 비난까지 해버렸다. 맙소사. 가족과 친구들에게 자신 있게 정병러 커밍아웃을 해놓고 나서도, 정신과 의사 선생님께 진단까지 받아놓고 나서도 내 우울증은 자책감과 자괴감, 자기혐오 같은 무기를 양팔에 단단히 끼고 호시탐탐 내 마음의 틈을 노린다. 

나중에 더 이야기하게 되겠지만, 나는 내가 가진 특권에 대한 생각을 종종 한다. 내 정신병이 내가 타고난 특권으로 나를 괴롭히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어서 그런 것도 있고, 내 주변에 나만큼 가진 사람이 나처럼 심한 우울증을 자각하고 앓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나는 은수저 집안에서 태어났고, 미국 유학을 10년째 하고 있고, 비싼 미대를 나와 반년을 백수로 살고 있지만 (아직까진) 괜찮고, 시스젠더, 헤테로 섹슈얼에 가정폭력을 당하지도 않았고, 객관적으로 외모가 못나지도 않은 데다 주변에 실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들(가족을 포함한)도 많이 있다. 내가 나를 정신병 환자로 당당하게 정체화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내가 받은 교육의 특권과 지난 2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여유와 경제적 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사회적 약자로 만드는 것은 유색인종에 외국 국적인 여자라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프고 힘들다.

내 이야기가 정병러 팀 블로그의 목적에 어떤 기여를 하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런 나도 정신병자예요" 라고, 정신 질환은 젠더와 섹슈얼리티, 경험과 나이와 부를 막론하고 모두가 타깃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전하는 데에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감히 예상해본다. 우울증을 포함한 여러 정신병은 죽음으로 이를 수 있으므로 치명적인 병이고, 그런 병에서 살아남으며 여기 이렇게 살아있다고 목소리를 내는 우리는 용감하고 강하다. 좋은 일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나쁜 일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고 했던가. 아이러니하지만 이렇게 고통을 공유하는 것은 위안이 된다. 나는,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고, 나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소소한 위로를 건넨다. 


by 윤윤 (@yoyoyyo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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